지난 한주 일본에서 무려 세차례나 지진이 발생했다. 모두 규모 6.5 이상으로 도쿄 등 일본 수도권에서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특히 11일 시즈오카(靜岡)현에서 일어난 지진의 경우 새벽 5시7분쯤 발생했는데 곤하게 새벽잠을 자던 사람들이 모두 깨어나 책상이나 탁자 밑으로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을 정도였다. 일본이 지진이 잦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이번처럼 짧은 기간에 세차례나 강진이 발생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도쿄에 사는 필자도 난생 처음 방바닥이 배를 탄 듯 출렁이는 느낌에 적지않게 놀랐다. 다행히 9일과 13일 발생한 지진은 진원지가 먼 바다였지만 11일 시즈오카 지진의 경우 도쿄에서 가까운 내륙연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히 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진발생 직후부터 일본 방송사들의 속보와 인터넷 뉴스까지 뒤지며 피해 규모를 일일이 확인했지만 의외로 지진규모에 비해 피해는 크지 않았다. 세번의 지진으로 사망자 1명에 부상자 120여명이 발생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처럼 피해가 적은 것은 일본정부와 국민의 철저한 사전대비때문이다. 일본에선 1996년부터 건물과 집들이 규모 7.0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의무화돼 있다. 고층빌딩들은 건물과 지면 사이에 적층고무를 끼워 지진충격을 최소화하고 있고 일반 가옥들도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보강공사등을 통해 지진에 대비하고 있다.

지진속보시스템도 세계에서 가장 잘 구축돼 있다. 일본 기상청은 지진파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방송국 시스템에 전달되도록 하는 지진속보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이번의 지진도 발생후 불과 3.8초만에 NHK 화면에 지진속보 자막이 떴다. 또한 시즈오카 지역의 경우 100여년을 주기로 규모 8.0 이상의 초대형 지진(도카이 대지진)이 찾아오는 위험지역이어서 일본 정부가 1978년부터 관련 특별법까지 만들어 대지진예측시스템 등을 가동해온 점도 피해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만약 한국에서 이번과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쑥대밭이 된다. 소방방재청이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6.8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가정하고 예상피해를 시뮬레이션해 지난해 10월 발표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경기도에서 6285명, 충북 4443명, 서울 4108명 등 전국적으로 2만2465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왔다. 부상자도 100만명 이상이나 발생하고 가옥과 건물도 전국적으로 100만채 이상이 전파 또는 반파되는 것으로 예측됐다. 예상이기는 하지만 피해가 이렇게 큰 것은 일본과 달리 한국의 건물들은 대부분 내진설계가 돼 있지 않은 데다 정부의 지진대비 시스템과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이 정도의 피해가 나려면 적어도 8.0 이상의 초대형 지진이 나야만 한다. 일본방재시스템연구소는 8.0 이상의 도카이 대지진이 날 경우 2만4700여명이 사망하고 가옥과 건물 96만채가 파괴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 지진방비 수준에 따라 일본에선 평범하게 끝날 지진도 한국에선 끔찍한 대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재난전문가들은 지진에 관한한 일본 뿐 아니라 한국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1978년 지진 관측 이후 지난해까지 한반도에서 총 770회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1978년부터 1996년까지는 연평균 18.4회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연평균 38.1회나 발생했다. 특히 1978년 이후 현재까지 규모 4.0 이상의 지진만 37회나 일어났다. 한반도에서 언제 6.0 이상의 강진이 터질지 모른다.

지난 2월 중순 서울에서 한 일본언론사의 서울특파원을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곧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슬쩍 “지진이 많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다. 그는 정색을 하면서 “한국 건물들은 대부분 내진시설이 없고 정부의 지진대비도 부족해 오히려 작은 지진에도 피해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저 웃어넘겼는데 이번 세차례의 지진을 겪으면서 나도 한국의 지진이 더 염려되기 시작했다.

도쿄=김동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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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특수부=정의' 공식 통해
오자와 수사 배경엔 의구심이

최근 일본인들은 검찰의 무서운 아집에 혀를 찼다.

지난 22일
우쓰노미야(宇都宮) 지법에서 열린 한 재판에서 보여준 전직 검사의 태도 때문이다. 이날 재판은 4세 여아 살해 혐의로 17년간 무기수로 복역 중 DNA 감정 결과가 뒤집혀 무죄 석방된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 재심 5차 공판이었다. 재판정에서는 사건 당시 담당 검사가 출석한 가운데 신문 과정의 육성 녹음 테이프가 공개됐다. 스가야는 이를 근거로 억지 자백 강요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담당 검사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만 할 뿐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수사에 대해 최소한의 사과를 바랐던 스카야는 또 한번 분노해야 했다.

이는 자신들이 한번 결정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번복하거나 오류를 인정치 않으려는 검찰의 속성을 잘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최근 진행 중인 도쿄지검 특수부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간사장 수사에서도 이런 검찰의 속성이 드러난다. 상당수 일본인은 특수부의 옛 명성에 기대어 '특수부=무오류, 오자와=절대악'이라는 도식을 너무 쉽게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 내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오자와뿐 아니라 특수부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최대 쟁점은 오자와가 미즈타니(水谷) 건설회사로부터 뒷돈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특수부는 오자와의 지역구인
이와테(岩手)현 댐 공사를 하청 수주하면서 사례금 5000만엔을 건냈다는 미즈타니 전 회장 진술을 결정적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진술은 정말 믿을 만한가. 특수부는 당시 미즈타니 회장의 진술을 근거로 2006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佐久) 후쿠시마(福島)현 지사를 구속한 바 있다. 미즈타니 측은 현 내 공사 수주를 위해 사토 지사의 동생이 운영하는 건설사의 토지를 시가보다 훨씬 비싸게 매입해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는 이를 토대로 사토 지사를 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미즈타니 회장의 진술은 법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심 재판에서 뇌물액수가 대폭 줄어들더니 지난해 9월 2심 판결에서는 사토의 수뢰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이 났다. "당시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던 미즈타니 회장이 검찰과의 거래를 위해 위장진술했다"는 사토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특수부는 이 미심쩍은 인물의 진술을 토대로 오자와에게 '위험한 도박'을 걸고 있다. 미즈타니 전 회장은 현재 탈세죄로 수감 중이다. 감형 등을 위해 검찰과 '거래'를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미즈타니 측은 뇌물 공여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오자와에 대해 어떤 진술을 해도 자신들은 기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오자와 간사장은 '아스팔트에서 인간에게로'를 외치며 공공건설예산을 대폭 삭감시켜 미즈타니를 비롯한 건설업계의 미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전문가들은 특수부가 이런 위험성을 알면서도 결국은 오자와를 기소할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특수부가 설사 재판을 통해 오자와를 유죄로 만들 수 없다 해도 사토의 예처럼 3년 이상 법정에 세움으로써 사실상 정치생명을 끊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사토는 구속과 함께 지사직이 박탈됐으며, 3년간 관련 지인 4명이 수사·재판 과정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오자와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 중·참 양원을 장악하면 검찰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지난해부터 파다했다. 민간인 검찰총장을 발탁하고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 방식에도 대대적인 칼을 댈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부가 검찰을 대표해 참의원 선거 전에 오자와를 몰락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과거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했던 시절 특수부는 유일한 권력 부패 견제장치였다. '특수부=정의'라는 공식도 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금 일본인들은 특수부가 스스로 거대권력화하며 때로는 검찰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의식하는 분위기이다. 오자와 수사는 '실세 정치인'의 최대 위기일 뿐 아니라 도쿄지검 특수부의 대국민 신뢰를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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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예산 삭감 주요 희생물로
한국도 현장 목소리 귀 기울여야

겨울이 오면 일본 곳곳에서 밤마다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홋카이도 삿포로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규슈의 사세보까지 주요 도시마다 중심가가 수십만개의 다양한 전구로 장식된다. 바야흐로 ‘루미나리에 축제’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루미나리에 축제는 일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필라멘트 전구에서 출발한 루미나리에는 발광다이오드(LED) 전구에 이르러 비로소 환상적인 색채를 완성했다. LED는 기존 전구보다 훨씬 밝고 다양한 색을 구현하면서도 전력소비는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일본은 바로 이 LED를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LED로 자유롭게 색채를 연출하려면 적색, 녹색, 청색 LED 소자가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이 중에서 청색 LED의 개발은 가장 큰 기술적 난제였다. 각국의 연구자들이 청색 LED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1993년에 비로소 일본 과학자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박사가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과학계로선 자국의 과학자가 ‘LED 혁명’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청색 LED의 개발과 이후의 전개과정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니치아화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나카무라 박사는 청색 LED를 개발해 회사 측에 연간 10억달러 이상의 기술로열티 수입를 올리게 했다. 회사 측은 당초 청색 LED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해 개발 중지를 지시했지만 나카무라 박사는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는 청색 LED가 LCD TV와 모니터, 휴대전화, 교통신호등, 차세대 DVD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면서 세계 과학계로부터 ‘일본의 에디슨’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가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은 고작 2만엔(약 26만원)의 포상금과 과장 승진이 전부였다. 회사 측은 직원의 연구성과는 당연히 회사로 귀속된다는 관행을 내세우며 특허권마저 회사로 귀속시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연구자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개발 성과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는 데 비해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연구자가 일개 샐러리맨에 지나지 않았다.

나카무라 박사는 결국 과학기술과 연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색한 대우에 실망해 1999년 니치아를 나와 미국 샌타바버라대학의 교수로 이직했다. 그의 미국행을 계기로 일본에선 젊은 과학인재들이 연구개발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인재유출 신드롬’이 일어났다. 뒤늦게 일본 정부와 기업은 과학 인재를 육성하고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일본 과학기술 연구자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최근 하토야마 정권은 예산을 삭감하면서 과학예산을 주요 희생물로 삼았다. 민주당 의원들은 “꼭 1등을 해야 하느냐, 2등은 안 되냐”면서 슈퍼컴퓨터 개발 등 각종 첨단기술 연구예산을 대폭 삭감하거나 아예 사업 자체를 폐지했다.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 등 일본 과학계를 대표하는 노벨상 수상자 4명은 이에 “하토야마 정부가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해놓고 관련 예산을 줄이고 있다”고 항의성명을 냈다.

이들은 지난해인 2008년의 과학기술 예산이 2000년을 100으로 봤을 때 중국은 436, 한국은 289, 미국은 185였는데 반하여 일본은 109에 불과했는데도 하토야마 정부가 퍼주기 공약을 위해 계속 과학연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뒤늦게 재조정을 지시했지만 과학계의 반발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과학기술은 몇몇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할 만큼 빠르게 발전했지만 막상 1990년대 정보기술(IT) 혁명이 진행되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한국과 미국에 눌리고 말았다. 일본 과학계는 과학기술과 연구자를 대하는 풍토의 차이가 빚어낸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가 폐지되고, 연구자들의 해외유출 문제까지 수면 위로 떠오른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은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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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美 완화요구에 日 꿈쩍 안해

현상유지하며 對美 협상력 높여

김동진 도쿄 특파원
주일미군 기지 재편과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급유 활동 등 안보 현안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하토야마 일본 정부의 ‘긴밀하지만 대등한 대미관계’를 평가하는 또 다른 시금석이 되어가는 양상이다.

지난 10일 양국은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 일진일퇴를 주고받았다.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미국 워싱턴을 찾은 아카마쓰 히로타카(赤松廣隆) 일본 농림수산상에게 미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월령 20개월 이하’로 제한된 일본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요건을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에 따라 대폭 완화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토머스 빌색 미 농무장관도 이날 아카마쓰 농림수산상을 만나 자국산 쇠고기 수입을 압박했다. 미국의 농업통상 정책을 좌우하는 투톱이 그간 쇠고기 문제로 일본 측에 쌓였던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 농림수산성도 자신들의 수장이 미 각료들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았다. 농림수산성은 이날 미국의 ‘타이슨 프레시 미트(Tyson Fresh Meat)’ 도축장에서 지난달 수입한 732상자의 냉동 등심 가운데 한 상자에서 광우병(BSE) 유발위험물질인 척수 부위가 발견됐다며 이 도축장에서의 쇠고기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카마쓰 장관은 이 같은 발표를 토대로 빌색 농무장관에게 강한 유감의 뜻을 전하고 금지된 부위가 포함된 경위에 대해 미 농무부 측의 조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양국의 농업통상정책 고위각료들의 첫 상견례 자리는 다소 썰렁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아카마쓰 장관의 태도를 통해 드러난 하토야마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정책은 역대 자민당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은 2002년까지 연 37만5000t(약 1조6200억원)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했지만, 고이즈미 정권 때인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사례가 최초로 발견되자 수입 중단 조치를 내렸다. 2006년부터는 생후 20개월령 이하에 한해 수입을 인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산 쇠고기의 일본 수출은 지난해 7만4000t에 그쳤다.

2008년 7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쇠고기 수입요건의 완화를 요구했지만 후쿠다 총리는 “식품안전을 지키는 입장에서 과학적 증거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여기에는 자민당 정권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자민당은 경단련 등 경제계의 요구에 따라 미일 FTA 체결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부시 정부가 집권 말기에 들어감에 따라 FTA 체결이 다음 정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자민당 내각 지지율이 계속 위험수위인 30%대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먹을거리 안전과 농민 보호, 검역 주권에 대한 국민감정을 거스르는 도박을 하기 어려웠다.

54년 만에 역사적인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정권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신중하기는 마찬가지다. 하토야마 정권은 특히 자민당 정권보다 FTA 체결에 더 조심스럽다. 총선 매니페스토(대국민 공약)에서도 FTA 체결 대신에 ‘교섭 촉진’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들의 지지세력인 농민들을 의식해 농업분야 등을 무리하게 희생하면서 체결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본 민주당 내에선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의료개혁 등 내치개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당분간 쇠고기 수입 등 통상 현안에 드라이브를 걸기 어렵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따라서 하토야마 정권은 앞으로 상당기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의 현상 유지를 택하면서 자신들의 통상 협상력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본의 상황을 보면 한국의 통상협상 관료들은 지난해 초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두 가지 잘못된 판단을 보였다. 한국이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하면 한미 FTA가 조만간 체결될 것이며 “일본도 곧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두 가지 전망 모두 빗나갔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로 국론분열의 ‘홍역’을 치르고도 아직 뚜렷한 소득을 얻지 못한 한국으로선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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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에서 민주당 정부의 동아시아 중시 외교노선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토야마 총리는 당초 방한 전날인 8일 총리 관저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기자회견을 갖기로 예정돼 있었다. 방한에 앞서 자신의 화해와 협력 메시지를 한국 언론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회견이 실무를 맡은 외무성 관료들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사실상 무산됐다.

외무성 관료들은 하토야마 총리의 한국 특파원 기자회견을 통역 없이 일본어로만 진행하겠다고 고집했다. 국제외교 관례상 국가원수가 상대국 언론과 인터뷰할 때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발언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통역을 대동한다.

외무성 관료들의 ‘딴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 특파원들에게 답변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라며 질문을 사전에 제출받은 뒤 자신들이 직접 일부 질문 내용을 수정해 여기에 맞춰 질의할 것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회견을 하루 앞둔 7일 오후에는 참석 언론사의 규모를 일방적으로 제한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총리 관저의 회견장이 좁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이날 밤늦게 태풍으로 총리가 바쁘다면서 회견 자체를 취소하고 외무성 아주국장의 브리핑으로 대체하겠다고 알려왔다.

2년 전 후쿠다 야스오 당시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앞두고 실시한 기자회견 때는 사전 질문 수정도, 참석자수 제한도 없었다. 외무성 관료들이 갑자기 이런저런 이유로 회견을 방해하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의 친한파 행보가 못마땅한 외무성 관료들이 총리를 가급적 한국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중간에서 의도적으로 일을 꼬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이 사실인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지만 외무성 관료들이 하토야마 총리의 역사적인 한국 방문에 재를 뿌린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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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 바라보는 두 시각

‘脫美入亞’ 기대반 우려반

8·30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후 일본 사회에는 상반된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자민당의 54년 통치로 형성된 ‘썪은 물’을 말끔히 씻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은 반면 ‘초보운전자’를 바라보는 듯한 불안감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일본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일본 사회가 예단할 수 없는 커다란 정치실험에 들어간 만큼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일본의 정권교체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지배 엘리트의 국가성장전략 교체 측면에서의 분석은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도 작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지배엘리트의 국가전략은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이었다. 문자 그대로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유럽 사회를 지향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국가 간 위계서열에서 영국과 독일 등 서구 국가를 최상층에 놓고 아시아를 밑에 놓는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이 같은 흐름은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한 자민당은 국가의 지휘하에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 그 자금을 바탕으로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수출해 ‘서구식 선진국’에 들어간다는 메이지 이래 성장모델을 답습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구 중에서도 미국을 ‘준거집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자민당의 노선은 ‘안보 문제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발전에만 매진한다’는 요시다 독트린로 집약된다. 덕분에 일본은 1980년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런 ‘탈아입미(脫亞入美)’ 노선은 1990년대 들어 벽에 부딪혔다. 미 컬럼비아대학의 제럴드 커티스 교수(정치학)는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1860년대 이후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아 대국으로서 인정받은 것을 기본목표로 추구해왔는데, 그 바람이 1980년대 고도성장으로 달성되면서 목표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이때부터 자민당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통 지배세력의 혼란이 시작됐다. 일본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후 고도성장 엔진이 식어버렸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도 유럽연합(EU)을 필두로 다양한 지역공동체가 출현하면서 다극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우산’ 밑에서 2위에 안주하는 기존 전략으로는 미국의 패권이 줄어드는 만큼 자신들의 입지도 좁아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면 그간 한수 아래로 봤던 중국과 한국, 인도,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들은 무섭게 성장했다. 특히 중국의 급부상은 일본의 위기를 촉진했다.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2000년에 일본의 4분의 1에 불과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내년에 일본을 추월하고 2020년에는 미국을 앞지를 전망이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미국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자민당은 기존의 ‘탈아입미’에만 집착해 아시아 경시외교를 계속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 대만 등과의 잦은 외교 마찰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아시아에서 일본의 대표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G8(주요8개국) 참여에 반대하고, 유엔 사무총장 경선에서 한국에 반대표를 던진 데 이르러서는 맹목에 가까운 아집이 느껴진다.

일본 민주당의 집권은 바로 이런 낡은 전략의 교체를 의미한다. 하토야마 유키오와 오자와 이치로, 마에하라 세이지 등 현 민주당 주역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국가성장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대안을 추구했던 세력이다. 이들의 입장은 온도차는 있어도 ‘탈미입아(脫美入亞)’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프랑스식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유럽 내에서조차 영국과 독일에 밀리던 프랑스는 1993년 유럽연합(EU) 발족 이후 1인당 국민소득이 42%나 증가했다. 영국이 미국의 우산에 집착한 반면 프랑스는 EU 탄생과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덕분이다. 프랑스는 현재 독일과 함께 EU를 이끄는 ‘양륜(두 바퀴)’으로 불린다.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공동체의 ‘양륜’이 되겠다는 게 민주당의 구상이다. 민주당의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이 140년 만에 밀어닥친 새로운 세계사적 ‘도전’에 가만히 앉아서 당할 것이냐, 아니면 ‘응전’할 것이냐는 분기점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동진 도쿄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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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민주화를 이룬 대통령.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대통령.
   IT 강국 코리아를 만든 대통령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대통령.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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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독도해역서 韓·日 공동훈련이라니


호랑이 안방으로 끌어들인 격

독도문제 늘 日에 뒤통수 맞아


최근 2주간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놓고 벌인 일들은 곱씹어 볼수록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야 할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이 독도 문제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일본의 해상자위대 함정들이 지난 8일 강원도 동해항에 입항했다. 자위대 군함이 그간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동해항에 들어온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해군의 설명대로라면 이번 방문은 양국의 군사교류와 우호증진을 위한 행사이다. 불행한 과거에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한미일 동맹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에서 양국 해군의 교류 강화를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이들 자위대 군함이 동해항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한일 해군의 합동훈련이었다. 양국 해군은 6∼7일 ‘한일 수색 및 구조 훈련(SAREX)’을 했다. 이 합동훈련은 조난 선박 발생 시 양국 해군 간의 공동대처 능력을 배양하고 군사교류 및 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1999년부터 시작돼 이번이 6번째이다.

그동안은 한일 양국의 선박 운행이 빈번한 제주도 남방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했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독도 인근해상으로 훈련무대를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도 동남방 80㎞ 해상에서 훈련이 진행됐다. 맑게 갠 날 독도가 보인다는 울릉도가 독도에서 88㎞ 정도 떨어져 있다. 합동훈련이 얼마나 독도와 가까운 거리에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순시선이 독도 인근에 출몰한 적은 자주 있었지만 해상자위대가 이곳에서 군함을 동원해 훈련한 일은 극히 드물다. 일본은 이번 훈련에 구축함(DDH) 2척과 소해함(MSC) 1척, 초계기(P-3C) 1대, 초계헬기(SH-60J) 1대 등을 참가시켰다.

이들은 모두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舞鶴)항에 주둔한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 소속이다. 이 부대는 해상자위대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독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출동하도록 돼 있다.

한국 국방부와 해군은 이번 훈련이 어디까지나 평화적·인도적 목적이라고 강조하지만 독도를 잃어버린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일본이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비한 부대를 독도 앞바다로 굳이 불러들여야 했는지 의문이다.

지난 17일 발표된 일본 정부의 ‘2009년도 방위백서’는 이런 지적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줬다. 일본 정부는 이 백서에서 “우리나라(일본) 고유 영토인 북방 영토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된 채 존재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더구나 방위백서 부록의 ‘주요부대 등의 소재지’ 지도에는 독도를 자기 영토로 표시했으며, 제3호위대군의 작전구역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방위백서는 한 나라의 국방 운용방향과 지침이다. 일본의 자위대는 모든 작전 활동에서 이 방위백서의 내용을 따른다. 이곳에 표기된 문구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백서의 토대에 따르면 한일 해군 간의 교류와 우호증진이라는 표면적인 명분에도 일본의 제3호위대군의 속내는 명백하다. 일본 땅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유한다는 전제 하에 독도 작전을 관할하는 이 부대에 이번 합동훈련은 독도 해역을 숙지하는 좋은 계기였음에 틀림없다. 우리 입장에선 호랑이를 안방으로 불러들인 꼴이다.

독도 앞바다는 한일 합동훈련보다는 매년 1∼2회에 그치는 우리 군의 ‘동방훈련’(독도방어훈련)을 연 5∼6회로 확대해 일본이 도저히 넘볼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할 곳이다. 백 번 양보해 동해상에서 한일 공동 훈련이 꼭 필요하더라도 독도 해역만큼은 끝까지 피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와 정치인, 언론들은 한일 우호를 말하면서도 독도 문제에서만큼은 매우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전제 하에 국제적으로 자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등 차근차근 치밀하게 영토분쟁에 대비해 나가고 있다. 지난 2주간의 사건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반면 우리는 늘 일본에 뒤통수 맞기 딱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럽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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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일본판 ‘살인의 추억’의 교훈

日 최초의 DNA수사 엉터리로
증거능력 다시 살펴봐야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오랜 여운을 남기는 걸작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터널 앞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가 내리는 철길 위에서 극중 서형사(김상경)가 유력한 용의자 박태규(박해일)를 두들겨 패며 범행 자백을 요구하고, 박태규도 악에 받쳐 자기가 죽였다고 대들면서 관객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때 멀리서 박형사(송강호)가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뛰어온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의뢰했던 DNA 분석 결과가 담긴 미개봉 서류였다. 박형사가 수갑을 찬 박태규를 때리는 사이 서형사는 재빨리 봉투를 뜯어 서류를 확인한다.

분석 결과는 DNA 불일치였다. 박태규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탈해진 박형사가 수갑을 풀어주자 박태규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분을 삭이지 못한 서형사가 터널을 향해 권총을 쏘아대지만 사건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만다.

실제 화성연쇄살인범을 쫓았던 당시 수사팀은 영화에서처럼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정액과 유력 용의자의 DNA 일치 여부를 1990년 외국기관에 의뢰했다. 다만 영화에서와 달리 분석을 맡은 곳은 미 FBI가 아니라 일본의 과학경찰연구소였다.

 그런데 한국 경찰이 일본에 화성사건의 DNA 분석을 맡긴 1990년 당시 일본의 DNA 과학수사가 얼마나 문제투성이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지난 17일 일본 TV방송에는 도치기현의 경찰본부장이 한 노인에게 머리숙여 사죄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 노인은 62세의 전 무기징역수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였다. 그는 1990년 자신이 버스운전사로 일하던 유치원의 4세 여아를 성추행하고 죽였다는 혐의로 일본 최초로 DNA 수사를 통해 붙잡힌 엽기살인범이었다.

하지만 그의 범행을 입증한 결정적 증거였던 DNA 분석이 엉터리였다는 것이 법원 재검사에서 밝혀지면서 그는 지난 4일 수감 17년 만에 석방됐다. 17일에는 자신을 수사했던 경찰수사팀의 책임자를 만나 처음으로 공식 사죄를 받았다.

1990년은 일본 경찰이 DNA 분석을 도입한 지 얼마 안 된 초창기였다. 당시 사용된 DNA 분석기법은 체액의 주인을 1000명당 1.2명 수준으로밖에 확정짓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증거로만 사용돼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 경찰과 검찰은 아동 성추행 살인범을 빨리 잡기를 바라는 여론을 의식해 다른 물증 없이 DNA 분석 결과만을 거의 유일한 증거로 스가야를 기소했다. 언론들은 ‘일본 최초의 DNA수사 개가’라는 검경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인권변호사들과 법의학자들이 법정에서 경찰의 DNA 분석의 한계와 결함을 지적하며 스가야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1심부터 3심 재판부까지 모두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스가야의 변호인단은 이후 16년 동안 줄기차게 DNA 재검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급기야 2003년 4조7000억명 중 1명 수준으로 DNA 분석의 정확도를 높인 신기술이 나오자 일본의 인권단체들과 변호사협회까지 나서서 재분석을 요구했다. 법원은 결국 여론에 밀려 2008년 12월 재분석을 실시했고, 올해 5월 스가야가 범인이 아니라는 최종분석 결과가 도출됐다.

그동안 스가야의 재검 요구를 묵살했던 일본 경찰과 검찰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2003년 이전까지 DNA 분석 결과를 유력한 증거로 채택해 기소했던 사건들에 대해 그 증거능력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비단 일본만의 일이 아닐 수 있다. 화성사건의 DNA 분석을 일본에 의뢰했던 국내 경찰도 1년 뒤인 1991년 국과수를 통해 DNA 분석을 시작했다. 우리 경찰도 2003년 전까지 10년 이상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불완전한 DNA 분석을 수사에 사용했다.

국내 최초의 DNA수사 성과는 1992년 8세 여아를 강제추행하고 달아난 범인이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현장에 떨어진 신문지에 묻은 정액의 DNA 분석을 통해 붙잡힌 사건이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과거 사건 수사에 활용된 DNA 증거능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쿄=김동진 특파원 bluewins@segye.com



김동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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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에 대한 단상>

내가 아는
한국 정치판은 시커먼 '뻘밭'이다.

그 뻘밭에 들어가면
누구나 시커먼 진흙이
몸에 묻게 된다.

어떤 놈은 머리 끝까지 온통 처바른 놈,
어떤 놈은 발과 무릎에만 묻은 놈,
차이는 있어도 거의 누구나 묻게 돼 있다.

 DJ는 그 뻘밭을
 가신의 등에 업혀 건넜다.

가신은 '주군'을 위해
진흙에
자신의 몸을 더렵혔지만
덕분에 DJ는
뻘밭을 무사히 건넜다.

'바보 노무현'은
이상주의자답게
안희정, 이광재 등과
어깨동무하고
그 뻘밭을 조심스럽게 건넜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그 어떤 정치세력보다
진흙이 덜 묻었지만

결국 뻘밭을 건넌 후
자신의 신발에
묻은 작은 진흙들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
건넜으면 좋았으려만...,

그는 그것조차 허용할 수 없는
' 바노 노무현'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어리석고,
또 한편으론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이제는
뻘밭이 되어버린
정치판을
우리 국민이
바꿔줘야 한다.

여야
누구라도
진흙을 묻히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바보 노무현의 신발에
묻은 진흙으로
자신의 온몸에 묻은
그 더러움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더 이상
발붙힐 수 없도록.....,


-------------------------------------------------
 한때
 정치부 기자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면서
지켜봤던 우리 정치판의 이면과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아
그 단상을 짧게 남깁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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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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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아라이 쇼케이(한국명 박경재) 자민당 중의원 의원


기득권에 맞섰던 한국계 중의원

비극적인 최후 ‘노무현과 닮은꼴’

조용한 주말 아침. 한국에서 타전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 소식에 일본 내 한인 사회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한국 정치문화에서 자살은 흔치 않은 사건이다. 그간 전직 대통령 2명을 포함해 적지 않은 권력핵심 인사들이 부패와 비리로 검찰조사를 받거나 감옥에 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더욱 안타깝고 충격적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정치인의 자살이 그리 낯설지 않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배를 가르던 사무라이의 할복 문화 탓인지 정치적 위기를 맞으면 구차한 변명 대신 자살을 택하는 정치인이 종종 있었다. 1945년 12월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가 태평양전쟁 전범재판을 거부하며 음독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현직 의원이나 각료가 자살한 사례만 8건에 달한다. 가깝게는 2007년 5월 마쓰오카 도시카쓰 당시 농림수산상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야당의 퇴진 압력에 시달리자 목을 맨 사건이 있었다.

심심치 않게 터지는 일본 정치인의 자살 중에는 아직도 60만 재일동포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사건이 있다. 1998년 2월 19일 50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 자민당 중의원의 죽음이다. 아라이는 원래 박경재라는 이름의 재일교포 3세였다. 그는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18살 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이후 1967년 도쿄대에 진학해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신일본제철에 입사하여 토종 일본인도 선망하는 대기업 사원이 됐다. 그러나 아라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주경야독으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일본 최고의 관료 집단인 대장성에 입성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업무 능력으로 촉망받는 관료로 성장했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이자 대장상이었던 와타나베 미치오는 그런 아라이의 능력을 높이 사 정계 입문을 권했다. 아라이는 와타나베 부총재의 추천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냈고 1983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 후보는 현 도쿄도 지사인 극우파 망언가 이시하라 신타로였다. 이시하라는 “조센징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면서 노골적으로 아라이의 혈통을 물고 늘어졌다. 이시하라의 선거운동원은 아라이의 선거포스터 3000여장에 ‘66년 북한에서 귀화’라는 내용이 적힌 검은 스티커를 붙였다. ‘그의 가족이 북한의 스파이’라는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아라이는 결국 쓰라린 패배를 맛봐야 했다.

그러나 아라이는 1986년 선거에 재도전해 중의원 배지를 달았다.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원내 진출 후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정치구조 개혁에 앞장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당내 보수적인 원로 의원들의 미움을 받게 됐다.

그런 와중에 1997년 12월 22일 닛코증권사가 차명계좌를 개설해 아라이에게 정치자금을 조성해준 사실이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정치인과 증권사 간의 은밀한 거래는 일본 정계의 오랜 관행이었다. 아라이는 “수많은 의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나만 문제 삼는 것은 민족차별”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관행이나 표적수사라는 항변으로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뚜렷했다. 결국 그는 체포되기 직전 스스로 목을 맸다.

아라이의 삶과 노 전 대통령의 삶은 닮은 데가 있다. 아라이는 일본 내 비주류로 출발해 민족차별을 극복하고 정계의 중심까지 진출했지만 관행적 부패에 연루돼 결국 자살을 택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상고 출신에서 최고의 권좌까지 오르는 성공 신화를 이뤘지만 퇴임 후 가족과 측근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역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라이가 죽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일본 정치권의 부패는 이어지고 있다. 아라이를 비롯한 여러 정치인의 자살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 원인인 정치관행을 개선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최근에도 제1야당의 대표가 비리로 사퇴하기도 했다.

한국 정치권은 지금 전직 국가원수가 비리와 관련하여 자살한 유례없는 비극을 경험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권은 비슷한 시련을 정치개혁의 계기로 삼지 못했다. 일본의 우를 답습하지 말고, 여야 모두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후진적 정치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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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퇴임 후 '비리 논란'에 휩싸였지만  
 고인이 한국 정치의 발전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5공 청문회에서 독재자 전두환을 향해 거침없이 호통치던
노 전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때의 그 '진정성' 만큼은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삼가 애도합니다.

2009년 5월 23일  도쿄에서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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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 1월 3당합당을 의결하던 통일민주당 의총장에서 반대하는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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