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리포트/칼럼'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0/08/30 일본TV에 조롱당하는 한국교육 현장의 역사 무관심 (3)
  2. 2010/08/02 [특파원 리포트] 간 나오토 총리의 용기를 기대하며
  3. 2010/07/06 월드컵 스타 혼다가 일본사회에 던지는 의미
  4. 2010/06/07 ‘하토야마 좌초’와 日사회의 함정
  5. 2010/05/10 <특파원칼럼>아사쇼류와 역도산, 그리고 일본사회
  6. 2010/04/12 [특파원 리포트] 6월이 두려운 하토야마와 오카다
  7. 2010/03/15 <특파원리포트> 누가 아사다 마오를 울렸나?
  8. 2010/02/10 일본보다 한국이 더 지진에 위험해....도쿄에서의 첫 지진경험 (5)
  9. 2010/02/01 도쿄지검 특수부는 무오류(?)...오자와 수사의 의도
  10. 2009/12/07 [특파원리포트] 루미나리에와 일본 과학계
  11. 2009/10/12 하토야마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통상정책
  12. 2009/10/09 [세계 프리즘] 日외무성, 특파원 회견 ‘재뿌리기’
  13. 2009/09/14 일본 지배엘리트의 국가성장전략 교체<특파원칼럼>
  14.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15. 2009/07/20 뒤통수 맞을 짓만 골라하는 한국....독도에서 한일합동훈련? (2)
  16. 2009/06/22 일본판 '살인의 추억'의 교훈... 한국도 똑같은 오류 가능성 커
  17. 2009/05/26 한국 정치판과 바보 노무현에 대한 단상 (1)
  18. 2009/05/24 노 전대통령과 아라이쇼케이 의원의 닮은꼴 비극
  19. 2009/05/23 노 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도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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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신사 앞에서 기념식을 갖고 있는 일본 극우단체 회원들.

 
 식민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고종황제라고?


지난 23일 일본의 TBS방송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즈음해 특별히 서울발 뉴스 한 꼭지를 전했다. 이 방송의 서울특파원이 사학명문인 양정고등학교의 ‘한일병합 100년 특별수업’ 현장을 찾아간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의 한일 역사 인식의 현주소를 짚어보겠다는 취지에서다. 결과는 놀라웠다. 역사교사가 한일 강제병합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통감부 건물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충격적인 답이 나왔다. 학생들 상당수가 태연하게 ‘고종’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한일병합에 대한 기초적 사실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뉴스는 이어 한국 20∼30대 젊은 세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가 한일 병합 100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답한 비율이 51.2%에 달했다면서 한국 젊은 세대가 과거와 달리 역사에 무관심하다고 분석했다.

도쿄에서 이 뉴스를 본 재일동포와 한국인들은 우리 청소년들이 대한제국 황제와 식민지 침략의 원흉을 동일 인물로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뉴스를 본 뒤 요즘의 일본 상황이 자꾸 되새김질됐다. 이 뉴스가 방송되기 바로 전날(22일) 도쿄도 도시마구(豊島區) 공회소에서는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와 극우세력이 정면충돌할 뻔했다. 한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의 일본실행위원회가 이 공회소에서 병합조약은 불법·무효임을 선언하는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 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하려고 하자, 행사장 주변에 ‘일본국정당’ ‘일본민족청년회의’ ‘전위행동대’ 등 극우단체의 차량 십여대가 출동해 실력 저지에 들어가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일본 정치판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지난 10일 한일병합 100년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에 대해 자민당 등 보수야당들은 일제히 비판하고 있다. 마치 간 총리가 있지도 않은 침략사실을 인정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하며 정치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여전히 침략과 수탈을 정당화하며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 중국이 득세하고 북한의 침략 위협이 높은 상황에서 한일 간 미래지향적 협력이 절실하더라도 우리가 일본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그런데 현재로선 ‘최악의 조합’이 연상된다. 지금은 한일 관계 개선과 과거사 반성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민주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일본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가까운 미래에 자민당 등 보수정권이 다시 들어설 가능성도 작지 않다. 그 시점에 한국 젊은 세대의 역사 무관심과 일본 극우세력의 끈질긴 식민지 침략 합리화 노력이 맞아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양정고교의 역사교사는 TBS 인터뷰에서 “글로벌 시대를 맞아 외국어 학습이나 경제 문제에 치우치면서 학생들이 역사를 소홀히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은 밤을 새워서라도 잊지 않으려고 하면서 정작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진실은 수능 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등한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2010학년도 수능에서는 국사 선택자가 6만9704명으로 수능 응시자의 10.9%에 불과했다고 한다. 국사 선택자가 수능 응시자 10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돼 있는 한 국사 선택자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에선 극우 역사 교과서를 통해 왜곡된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있는 꼴이다.

우리의 교육정책 입안자들이 일본 매스컴조차 ‘조롱’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역사 무지를 ‘장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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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쟁책임 회피에만 급급
간 총리 담화서 진솔하게 사과하길

전 세계의 민족마다 독특한 언어 습관이 있다. 그 습관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민족의 문화 및 심리 구조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된다. 일본어도 예외는 아니다.

한일강제합병 100년을 맞아 주목하고 싶은 일본의 언어 습관이 있다. 일본인들이 1인칭 주어를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언어가 화자 자신을 지칭할 때 경제성 원리에 따라 가장 짧은 한 음절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1인칭 주체는 ‘나’이며 중국어는 ‘워(我)’, 스페인어는 ‘요(Yo)’, 프랑스어는 ‘즈(Je)’ 등으로 대부분 한 음절이다. 영어의 아이(I)도 한 개의 이중모음이다.

그런데 중세 일본어에서 ‘나’라는 말은 네 음절인 ‘와타쿠시(私)’였으며 근대에 와서 한 음절 짧아진 ‘와타시’가 됐다. 아주 현대에 와서야 남자의 경우 한정된 상황에서 ‘보쿠(僕)’나 ‘오레(俺)’를 쓸 따름이다.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을 칭할 때 이처럼 독특하게 긴 주어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 또는 집단 앞에서 자기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아 왔다는 증거로 문화인류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런 언어 습관은 일본인들이 종종 주어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그 말과 행동이 자신의 생각인지 자기 집단의 생각인지, 아니면 타 집단까지 포함한 전체 집단의 것인지를 애매하게 흐리는 악습으로 연결되고 있다.

1952년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공원에 세워진 ‘원폭사망자위령비’(히로시마 평화도시기념비)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누가 잘못을 일으켰고, 누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에 대해 주어 표현이 없다. 심지어 일본이 피해자로 해석될 수도 있는 표현이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히로시마 측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전 인류에게 원폭 투하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고 호소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한발 더 나아가 이 비문에서 ‘잘못’이라는 표현도 지워버리자고 주장한다.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나치의 만행과 이를 용인한 독일 국민의 과오에 대해 분명하게 주체를 표현해 사과하고 있는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일본이 지난 7월 25일 2차대전 말 연합국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했던 장소인 독일 포츠담까지 찾아가 추도비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유럽 거주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일본 본국에서 기부금을 모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이 원폭 투하 명령을 내렸던 당시 머물렀던 저택 앞에 ‘히로시마 광장’을 조성하고 원폭 피해자 추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에도 역시 “원폭의 파괴력은 수십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을 초래했다. 핵 병기가 없는 세계를 바란다”며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쏙 뺐다.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그로 인한 끔찍한 재앙에 대해 전 세계를 향해 “우리(인류) 모두 반성하자”는 식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한 시민단체가 일본의 이런 촌극에 대해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전쟁의 희생자로 간주하고 있다. 포츠담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돕고 있다”고 비판하는 기고문을 독일 언론에 투고해 포츠담 현지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일합병 100년을 맞는 오는 22일을 즈음해 식민지 지배를 사과하는 총리 담화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간 정권이 동아시아공동체와 한일 역사 협력을 강조해온 점에서 이번 담화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감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간 식민지 지배와 강제징용, 위안부, 문화재 약탈 등에 대해 일본이 ‘통석의 념’이나 ‘불행한 과거’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너무 자주 봤다. 이번만큼은 주어 없는 표현으로 책임의 주체를 흐리지 말고 진솔한 사과와 함께 한일강제합병의 무효화와 성의있는 피해보상을 선언해야 한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1970년 12월 7일 비 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던 것을 뛰어넘는 간 총리의 결단과 용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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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에서 무릎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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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 같이 나타나 16강행 견인
일본 선수 같지 않은 언행 주목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은 매회 새로운 스타들을 낳는다.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에 진출한 일본 축구대표팀도 혼다 게이스케(本田圭佑·24)라는 젊은 별을 배출했다. 혼다는 이번 대회에서 일본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를 맡아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조별예선 통과를 주도했다.

혼다의 활약은 일본인들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것 같다. 일본의 출판서점가에선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대회가 열리면 스타마케팅 차원에서 선수들의 자서전이나 관련 서적으로 특별기획 코너를 꾸민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와 영국의 웨인 루니 등과 함께 나카무라 순스케와 나카자와 유지, 툴리오 같은 일본 선수들의 책이 주로 진열됐다. 그러나 혼다에 대한 서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광고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월드컵 개막 수주 전부터 여러 대표선수들이 각종 CF에 등장했지만 혼다는 조별예선 1차전 카메룬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에야 예전에 찍었던 음료수 CF 한 편이 빛을 봤을 뿐이다.

 이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혼다가 단숨에 일본 축구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니 큰 사건이다. 일본 언론들이 ‘혼다를 통해 일본의 혼을 봤다’면서 그를 일본 축구가 낳은 최고 스타라고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혼다 등장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선 그가 그간 일본뿐 아니라 해외 언론으로부터 플레이 스타일이나 생활방식, 언행 등에서 “전혀 일본선수 같지 않은 선수”로 평가받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혼다는 미드필드에서 안전한 패스로 볼점유율을 높이다가 골 기회를 엿보는 일본식 축구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들 만큼 공격성향이 강하다. 실패를 겁내지 않고 과감한 돌파와 전진 패스를 시도하며 쉴 새 없이 상대 진영을 파고든다. 키 182㎝, 몸무게 74㎏의 체격으로 몸싸움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으며 회전·무회전 프리킥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의 이런 능력은 J리그에선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08년 해외에 진출한 후 꽃을 활짝 피웠다. 네덜란드 2부리그팀 ‘벤로’에서 2008∼2009 시즌 팀내 최다인 16골을 넣으며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올 초 러시아의 CSKA모스크바로 이적해서도 단기간에 3골 2어시스트를 기록, 유럽 빅리그의 주목을 받았다.

 해외에 진출한 일본 선수들이 대부분 현지 언어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는 데 반해 혼다는 현지화에 적극적이다. 그는 네덜란드와 러시아 리그에서 일부러 통역 없이 생활하며 영어나 러시아어를 배워 동료나 코치진과 소통하고 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는 해외 진출 일본인 선수 중 처음으로 소속팀 주장까지 맡아 리더십까지 검증받았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언행도 일본에선 보기 드물다. 혼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리그에서 탈락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감독의 지시를 일부러 어겼다고 고백해 파문을 일으켰다. 골을 넣지 못하며 수비에 집착하는 일본 축구 흐름에 대해서도 불만을 끊임없이 표출했다. 지난달 29일 16강 파라과이전에서 패한 직후 동료선수들은 인터뷰에서 “이길 수 있었는데 분하다”거나 “세계 수준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됐다”고 말했지만 혼다는 “당연한 결과다.
각각의 힘에선 (일본은) 아직 부족하다”고 실력 부족을 인정해 일본 취재진을 당황케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 축구계는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그가 공격에 치중해 수비 가담이 적고, 패스 실패로 흐름을 자주 끊어먹는다고 비판했다. 유럽 선수 같은 성격이나 언행도 팀 화합을 중시하는 일본 축구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됐다. 그가 일본 축구의 모범생인 나카무라 순스케에게 늘 포지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오카다 일본대표팀 감독은 월드컵 직전 열린 5차례 평가전에서 1무4패를 기록하자 나카무라를 버리고 혼다를 택하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팀은 쉴 새 없이 상대를 압박하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돌파와 정교한 프리킥으로 무장한 새로운 팀으로 태어났다. 이런 맥락에서 혼다의 성공이 ‘일본적인 것’에 집착하다가 정체에 빠진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에 던지는 의미도 적지 않아 보인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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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텐마 공약 발목… 민심 등돌려
‘8개월 유산’ 도매급 처분 말아야

지난 1일 밤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의 일본 총리 관저. 민주당 수뇌부와의 회동을 마치고 돌아온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최측근인 히라노 히로후미(平野博文) 관방장관과 마쓰이 고지(松井孝治) 관방부장관을 자신의 집무실로 조용히 불렀다. 총리는 낮고 조용한 어조로 자신이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의 ‘초심’과 정치자금, 후텐마(普天間) 문제 등으로 정권을 스스로 망쳐 버렸다는 자책을 토해냈다. ‘주군’의 말 속에 사퇴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상황은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신’ 히라노 관방장관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고 총리가 다독였다. 일본 언론들이 전하는 하토야마 총리의 최초의 사퇴표명 순간이다.

권력은 무상하다. 하토야마 정권이 지난해 9월 54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로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 불과 8개월여 만에 이렇게 맥없이 좌초할 줄 누가 알았을까.

현재 일본 열도는 하토야마 정권에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과 분노로 들끓고 있다. 여기저기서 하토야마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일부 경박한 주간지들은 ‘하토야마=사이코’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주류 언론들도 어떻게든 그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다.

퇴진의 도화선이 된 오키나와 지역의 반응은 더욱 격하다. 그들은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 공약을 지키지 않은 하토야마에게 각종 인터뷰를 통해 분노를 토해내고 있다. “저런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니 분하다”, “정말 무책임한 사기꾼 정치인이다”, “우리를 갖고 놀았으니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 등등.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하토야마 입장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 쳐놓은 ‘말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번지는 ‘하토야마 때리기’에 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일본 사회에 ‘독’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토야마 8개월이 남긴 적지 않은 유산들을 도매금으로 폐기처분하는 우를 범할 수 있어서다. 후텐마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하토야마 총리는 역대 총리 가운데 오키나와에 가장 동정적이었다. 표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키나와의 중의원 의석은 고작 4개이다. 그보다는 2009년이 ‘류큐(오키나와 옛 이름)’왕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13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보다 30년 앞서 병합된 오키나와는 미군의 엄청난 포격을 받았고, 막판에는 일본 군부의 옥쇄(자결) 명령으로 수천명이 희생됐다. 종전 후에도 미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전쟁은 일본 본토가 일으켰는데 그 책임과 피해는 핏줄과 언어, 문화가 다른 오키나와가 거의 모두 짊어진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상처를 안고 있는 오키나와의 고통을 일본 본토가 나눠 역사적 화해와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이를 위한 첫과제였다. 그가 이상주의에 치우쳐 동북아 안보현실을 간과했던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가 제기하고 싶었던 근본적 문제의식 자체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일본의 과제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지난달 말 47개 도도부현의 수장들이 모이는 전국지사회의를 소집해 기지 이전은 어렵지만 오키나와 미군의 헬기훈련을 각 지역이 조금씩 분담하자고 호소했다.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지사만 호응했을 뿐 모두 고개를 돌렸다. 거절할 때조차 “한번 검토해 보겠다”고 표현하는 일본사회에서 이처럼 단호한 거절은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논란에는 단순히 자신의 지역에 기피시설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님비현상’을 넘어 역사적 배경과 민족감정이 담겨 있지만, 일본 언론들은 모든 실패의 책임을 하토야마에게 돌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향후 일본의 어떤 총리도 오키나와 기지문제에 다시는 손을 대지 않을지 모른다.

하토야마 총리는 일본의 역대정부가 수십년간 국민을 속여온 ‘핵밀약’을 밝혀내 스스로 사과했고, 수십년간 고통 속에 방치했던 미나마타병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올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역사화해를 위한 전향적인 조치도 준비하고 있었다. 하토야마가 권력의 무대에서 퇴장하더라도 그가 던진 이런 화두들은 후임 간 나오토(菅直人) 정권에서도 반드시 계승되길 바란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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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쇼류가 호쾌한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

스모판서 승승장구한 이방인들
성공불구 일본 폐쇄성에 상처입어


얼마 전 일본에선 평양에서 타전된 사진 한 장이 큰 화제였다. 북한을 방문 중인 곰보자빈 잔단샤타르 몽골 외무장관 일행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촬영한 기념사진 때문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 스모의 요코즈나(橫綱·천하장사)로 군림했던 아사쇼류(朝靑龍)가 그 속에 찍혀 있었다.


마와시(스모 샅바)를 벗고 양복을 입은 생소한 모습의 아사쇼류가 몽골의 대북 비즈니스를 돕기 위해 나선 것에 대해 일본인들은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그는 올해 초 스모대회 기간에 음주폭행 사고를 일으키고 이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는 비난에 몰려 지난 2월 초 스모판을 떠났다. 기자회견을 통해 자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적으로 사실상 강제퇴출된 것이다.

아사쇼류의 본명은 드르고르스렌 다그와드르지로, 몽골어로 ‘월요일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몽골씨름 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도일했다. 힘든 연습생 생활을 거쳐 1999년 정식 데뷔한 뒤 스모판에서 승승장구했다. 신장 184㎝, 몸무게 154㎏으로 스모판에서는 체구가 작은 편에 속했지만 화려한 기술로 신장 2m, 체중 200㎏이 넘는 거구들을 연달아 제압했다.

밀어내기 위주의 단순한 경기가 주류를 이뤘던 스모판에서 그는 한국 씨름에서나 볼 수 있는 들배지기나 뒤집기 같은 역동적이고 호쾌한 기술을 구사하며 은퇴 전까지 무려 25차례 우승했다.

하지만 그는 현역 내내 일본 언론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 2003년 이후 일본인 요코즈나가 완전히 사라진 스모판에서 ‘후진국’ 몽골 선수가 활개를 치는 모습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언론들은 그가 승리할 때마다 두 주먹을 치켜올리며 포효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에 대해 요코즈나의 품격을 해쳤다고 비난했다. 패배자를 배려하지 않는 오만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승부조작과 음주, 여자관계, 후배 폭행, 꾀병 소동 등 그와 관련된 추문이 끊임없이 지면을 장식했다. 직설적 성격의 아사쇼류는 언론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흥분했고 그것이 또 다른 비판으로 이어졌다.

언론의 폭로가 사실인 것도 있지만 과장, 왜곡된 것들이 많았다. 은퇴의 발단이 된 음주폭행사건도 최근 뒤늦게 내막이 알려지면서 아사쇼류의 억울함이 부각되고 있다. 폭행을 당했다고 알려진 식당 주인은 언론 보도와 달리 일반 시민이 아니라 야쿠자 출신이며 먼저 아사쇼류에게 시비를 걸었고, 아사쇼류는 주먹을 사용하지 않고 완력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만취해서 일반시민을 마구 때렸다’식의 보도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아사쇼류는 최근 두달이나 지나 뒤늦게 몽골까지 찾아와 ‘왜 사건 당시 언론에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냐’는 한 언론의 질문에 “당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냥 안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들 중에는 아사쇼류를 보면서 재일동포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함경남도 출신인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이다. 기골이 장대한 장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38년 16살 때 지역 씨름대회에서 성인들을 꺾고 3등에 올랐다. 그의 소질을 높게 평가한 일본인 경찰관의 주선으로 18살 때 현해탄을 건넜다.

그는 타고난 소질과 노력으로 연습생에서 스모계의 3번째 등급인 세키와케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스모협회의 태도가 달라졌다. 승급요건을 갖췄는데도 ‘품격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그를 승급에서 제외했다. 조선인이 너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흥행상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혈질인 역도산은 협회 사무실을 찾아가 집기를 때려부수며 거칠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그는 1950년 은퇴한 뒤 한동안 방황하다가 프로레슬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해로 역도산이 스모판을 떠난 지 딱 60년이 된다. 그런 해에 가난한 나라 몽골 출신의 아사쇼류가 스모판에서 ‘이지메’(집단 괴롭힘)로 내쳐지는 모습은 일본 스모, 아니 일본 사회가 겉으로는 외국인들을 받아들여 국제화된 듯 보이지만 내부에는 아직도 뿌리 깊은 폐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읽힌다.

김동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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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선수 시절의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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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텐마 美 기지 이전 실행 난항
“월드컵 4강” 섣부른 호언장담

지금 일본에 6월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와 오카다 다케시(岡田武史)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이들은 한때 ‘하토야마 재팬’과 ‘오카다 재팬’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키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현재 흘러가는 모양새로 보면 오는 6월에는 여론의 ‘단두대’에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

둘 다 승리에 도취돼 내뱉은 공약이 부도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오카다 감독은 지난해 6월 6일 우즈베키스탄 원정경기에서 1-0으로 꺾고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는 다음 날 의기양양하게 나리타 공항에 내리면서 국민과 언론을 향해 제일성으로 “월드컵 4강을 노리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축구의 수준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선언에 대해 무리라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오카다 감독은 “결코 꿈이 아닌 가능한 현실적 목표”라고 강조했고, 서포터와 언론도 덩달아 “4강! 4강!”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는 올해 신년 기자회견 때도 “4강 진출의 꿈을 함께하는 선수들의 수가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늘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지난 2월 동아시아축구대회에서 일본 대표팀은 1승1무1패로 3위에 머물렀다. 중국과는 비겼고, 숙적인 한국에는 3-1로 참패했다. 이쯤에서 ‘16강 진출’ 또는 ‘해외 개최 월드컵에서 최초의 1승’이라는 식으로 목표를 현실적으로 수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카다는 오기를 부렸다.

그는 주변의 비판에 대해 “이번 대회에서는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우리 팀만의 축구, 패스를 통한 움직임 등 전술적인 수정은 없을 것이다. 4강 목표는 변함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일본 대표팀은 지난 7일 사실상 2진급으로 꾸려진 세르비아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가진 평가전에서 3-0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일본 국민들은 “4강은커녕 조별리그 전패가 불보듯 뻔하다”며 분노하고 있다. 오카다 감독은 지금 달력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을 지워버리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토야마 총리도 동병상련이다. 지난해 8·30 총선에서 54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沖繩)현의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의 현외 이전을 공약했다. 미일 양국이 10년간의 논의 끝에 2006년 같은 현 나고시의 주일미군 슈워브 기지로 옮기기로 한 합의안을 백지화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안팎에선 당연히 미일 동맹의 손상을 우려했다. 일본 내에서 미군기지를 받아들이겠다는 지방자치단체를 구하기 어려운 데다 미국도 동북아 안보전략상 오키나와를 떠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외, 심지어 국외 이전까지 주장하는 연립 파트너 사민당을 설득하는 문제도 쉽지 않은 과제다. 잘못하면 미국과 오키나와, 연립 파트너를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하토야마 총리는 이런 우려에도 “오키나와의 이해도 얻고, 미일 동맹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지난해 11월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이 문제의 조기해결을 요구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트러스트 미(나를 믿어라)”라고 안심시켰다. 이어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때는 “내년 5월 말까지 반드시 후텐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측근들이 이해관계 조정의 어려움을 감안해 마감 시한을 못박는 것은 위험하다고 조언했지만 하토야마는 귀를 닫았다.

현실은 하토야마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하토야마 정권은 최근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과 오키나와 측에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내 슈워브 육상부와 화이트비치 앞바다로 순차적으로 옮기는 이전안을 제시했지만 양측 모두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일본에선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하토야마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끓어오르고 있다. 그에게 ‘숨겨진 비장의 카드’가 없는 한 6월 1일부터 일본 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릴 때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술이 깬 다음 날부터 맞닥뜨릴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하토야마 총리와 오카다 감독은 지금쯤 뒤늦게 절감할 것 같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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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나고야, 악셀, 그리고 눈물

日 사회 고질적병폐 보여주는 듯
현실과 괴리된 채 자기방식만 고집

일본에선 최근 수주간 두 인물이 단연 화제였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 은메달리스트인 아사다 마오와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전자는 일본 스포츠, 후자는 일본 경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시련을 맛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마음도 편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각종 언론매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아사다를 ‘부당한 채점의 피해자’, 도요다 사장을 ‘일본 때리기의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 최대 포털인 야후재팬에서는 네티즌들이 ‘한국의 피겨 심판 매수설’을 버젓이 사실인 양 주장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패는 이렇게 남의 탓으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를 보여주는 듯하다.

 두 사람은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모두 일본의 3대 도시(인구 230만)인 나고야 출신이라는 점이다. 나고야는 도요타의 본사와 하청 부품업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경제적으로는 일본 내에서도 가장 부유한 곳이다. 버블 붕괴로 일본의 경기가 어려웠을 때도 나고야만큼은 도요타의 수출 호조 덕분에 불황을 모르는 도시로 유명했다.
 
 그 덕분에 일본 내 어느 도시보다 스포츠 인프라가 잘 구축돼 아이스링크도 여러 개 갖고 있다. 또한 자녀에게 피겨를 가르칠 만한 경제력을 갖춘 중산층 가정도 잘 형성돼 있다. 아사다와 안도미키, 스즈키 아키코 등 상당수 일본 피겨선수들이 나고야 출신이다.

 두 번째로 둘 다 ‘악셀’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맛봤다는 점이다. 영어로 가속기는 Accelerator, 피겨 점프 기술은 Axel이지만 일본어로는 모두 악셀(アクセル)로 표기되고 발음도 같다. 이번 올림픽에서 아사다의 승부수는 트리플 악셀(3회전 반)이었다. 트리플 악셀만 성공하면 김연아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런 집착이 오히려 연기 완성도를 떨어트려 패배의 단초를 제공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품질을 자랑하던 도요타의 아성도 악셀 페달의 결함에서 시작된 리콜사태로 붕괴의 위기에 몰려 있다.
 
 끝으로 두 사람은 같은 날 눈물을 보였다. 아사다는 2월24일 열린 쇼트프로그램 경기에서 김연아가 78.50점으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자신을 제치고 1위에 오르자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을 노출했다. 같은 날 미국 하원 청문회 출석을 마친 도요다 사장도 미 현지공장 근로자들이 마련한 집회를 방문했을 때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들이 보인 눈물의 항변에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이 있다. 현재의 채점룰은 국제피겨연맹이 2007∼08년 시즌부터 적용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아사다가 뛴 ‘트리플 악셀-더블 토루프’ 조합(5회전 반)보다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조합(6회전)이 기본배점도 더 높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도요타의 경우도 2010년에 갑자기 차량 결함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이미 2005년부터 관련 결함이 계속 신고되고 있었다. 초기부터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관련 대책을 세웠더라면 최근 같은 위기와 수모는 당하지 않아도 됐다.

 수험생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출제 의도와 채점 기준이 명백하게 나와 있는데도 거기에 맞춰 준비하기보다는 현실과 괴리된 채 자기 방식만 고집한 것이다. 이는 용감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현명하지 못한 대응이다.


 여기에는 일본 언론의 침묵이 큰 일조를 했다. 도요다 사장은 일본 내 최대 광고주이며 아사다는 주니어 시절부터 피겨 천재로 일본 국민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온 국민스타였다. 언론이 함부로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하기 어려운 일종의 성역이었다. 수년 전부터 둘의 대응에 명백한 결함이 보이는데도 누구 하나 제대로 지적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패가 명백해진 지금도 뼈저린 반성과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심판들의 농간이나 미 정치권의 음모로 몰아가면서 문제의 원인을 덮으려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사다와 도요다 사장의 가장 큰 적은 김연아와 현대자동차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일본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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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 일본에서 무려 세차례나 지진이 발생했다. 모두 규모 6.5 이상으로 도쿄 등 일본 수도권에서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특히 11일 시즈오카(靜岡)현에서 일어난 지진의 경우 새벽 5시7분쯤 발생했는데 곤하게 새벽잠을 자던 사람들이 모두 깨어나 책상이나 탁자 밑으로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을 정도였다. 일본이 지진이 잦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이번처럼 짧은 기간에 세차례나 강진이 발생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도쿄에 사는 필자도 난생 처음 방바닥이 배를 탄 듯 출렁이는 느낌에 적지않게 놀랐다. 다행히 9일과 13일 발생한 지진은 진원지가 먼 바다였지만 11일 시즈오카 지진의 경우 도쿄에서 가까운 내륙연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히 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진발생 직후부터 일본 방송사들의 속보와 인터넷 뉴스까지 뒤지며 피해 규모를 일일이 확인했지만 의외로 지진규모에 비해 피해는 크지 않았다. 세번의 지진으로 사망자 1명에 부상자 120여명이 발생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처럼 피해가 적은 것은 일본정부와 국민의 철저한 사전대비때문이다. 일본에선 1996년부터 건물과 집들이 규모 7.0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의무화돼 있다. 고층빌딩들은 건물과 지면 사이에 적층고무를 끼워 지진충격을 최소화하고 있고 일반 가옥들도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보강공사등을 통해 지진에 대비하고 있다.

지진속보시스템도 세계에서 가장 잘 구축돼 있다. 일본 기상청은 지진파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방송국 시스템에 전달되도록 하는 지진속보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이번의 지진도 발생후 불과 3.8초만에 NHK 화면에 지진속보 자막이 떴다. 또한 시즈오카 지역의 경우 100여년을 주기로 규모 8.0 이상의 초대형 지진(도카이 대지진)이 찾아오는 위험지역이어서 일본 정부가 1978년부터 관련 특별법까지 만들어 대지진예측시스템 등을 가동해온 점도 피해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만약 한국에서 이번과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쑥대밭이 된다. 소방방재청이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6.8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가정하고 예상피해를 시뮬레이션해 지난해 10월 발표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경기도에서 6285명, 충북 4443명, 서울 4108명 등 전국적으로 2만2465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왔다. 부상자도 100만명 이상이나 발생하고 가옥과 건물도 전국적으로 100만채 이상이 전파 또는 반파되는 것으로 예측됐다. 예상이기는 하지만 피해가 이렇게 큰 것은 일본과 달리 한국의 건물들은 대부분 내진설계가 돼 있지 않은 데다 정부의 지진대비 시스템과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이 정도의 피해가 나려면 적어도 8.0 이상의 초대형 지진이 나야만 한다. 일본방재시스템연구소는 8.0 이상의 도카이 대지진이 날 경우 2만4700여명이 사망하고 가옥과 건물 96만채가 파괴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 지진방비 수준에 따라 일본에선 평범하게 끝날 지진도 한국에선 끔찍한 대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재난전문가들은 지진에 관한한 일본 뿐 아니라 한국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1978년 지진 관측 이후 지난해까지 한반도에서 총 770회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1978년부터 1996년까지는 연평균 18.4회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연평균 38.1회나 발생했다. 특히 1978년 이후 현재까지 규모 4.0 이상의 지진만 37회나 일어났다. 한반도에서 언제 6.0 이상의 강진이 터질지 모른다.

지난 2월 중순 서울에서 한 일본언론사의 서울특파원을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곧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슬쩍 “지진이 많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봤다. 그는 정색을 하면서 “한국 건물들은 대부분 내진시설이 없고 정부의 지진대비도 부족해 오히려 작은 지진에도 피해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저 웃어넘겼는데 이번 세차례의 지진을 겪으면서 나도 한국의 지진이 더 염려되기 시작했다.

도쿄=김동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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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특수부=정의' 공식 통해
오자와 수사 배경엔 의구심이

최근 일본인들은 검찰의 무서운 아집에 혀를 찼다.

지난 22일
우쓰노미야(宇都宮) 지법에서 열린 한 재판에서 보여준 전직 검사의 태도 때문이다. 이날 재판은 4세 여아 살해 혐의로 17년간 무기수로 복역 중 DNA 감정 결과가 뒤집혀 무죄 석방된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 재심 5차 공판이었다. 재판정에서는 사건 당시 담당 검사가 출석한 가운데 신문 과정의 육성 녹음 테이프가 공개됐다. 스가야는 이를 근거로 억지 자백 강요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담당 검사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만 할 뿐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수사에 대해 최소한의 사과를 바랐던 스카야는 또 한번 분노해야 했다.

이는 자신들이 한번 결정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번복하거나 오류를 인정치 않으려는 검찰의 속성을 잘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최근 진행 중인 도쿄지검 특수부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간사장 수사에서도 이런 검찰의 속성이 드러난다. 상당수 일본인은 특수부의 옛 명성에 기대어 '특수부=무오류, 오자와=절대악'이라는 도식을 너무 쉽게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 내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오자와뿐 아니라 특수부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최대 쟁점은 오자와가 미즈타니(水谷) 건설회사로부터 뒷돈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특수부는 오자와의 지역구인
이와테(岩手)현 댐 공사를 하청 수주하면서 사례금 5000만엔을 건냈다는 미즈타니 전 회장 진술을 결정적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진술은 정말 믿을 만한가. 특수부는 당시 미즈타니 회장의 진술을 근거로 2006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佐久) 후쿠시마(福島)현 지사를 구속한 바 있다. 미즈타니 측은 현 내 공사 수주를 위해 사토 지사의 동생이 운영하는 건설사의 토지를 시가보다 훨씬 비싸게 매입해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는 이를 토대로 사토 지사를 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미즈타니 회장의 진술은 법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심 재판에서 뇌물액수가 대폭 줄어들더니 지난해 9월 2심 판결에서는 사토의 수뢰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이 났다. "당시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던 미즈타니 회장이 검찰과의 거래를 위해 위장진술했다"는 사토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특수부는 이 미심쩍은 인물의 진술을 토대로 오자와에게 '위험한 도박'을 걸고 있다. 미즈타니 전 회장은 현재 탈세죄로 수감 중이다. 감형 등을 위해 검찰과 '거래'를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미즈타니 측은 뇌물 공여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오자와에 대해 어떤 진술을 해도 자신들은 기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오자와 간사장은 '아스팔트에서 인간에게로'를 외치며 공공건설예산을 대폭 삭감시켜 미즈타니를 비롯한 건설업계의 미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전문가들은 특수부가 이런 위험성을 알면서도 결국은 오자와를 기소할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특수부가 설사 재판을 통해 오자와를 유죄로 만들 수 없다 해도 사토의 예처럼 3년 이상 법정에 세움으로써 사실상 정치생명을 끊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사토는 구속과 함께 지사직이 박탈됐으며, 3년간 관련 지인 4명이 수사·재판 과정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오자와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 중·참 양원을 장악하면 검찰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지난해부터 파다했다. 민간인 검찰총장을 발탁하고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 방식에도 대대적인 칼을 댈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부가 검찰을 대표해 참의원 선거 전에 오자와를 몰락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과거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했던 시절 특수부는 유일한 권력 부패 견제장치였다. '특수부=정의'라는 공식도 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금 일본인들은 특수부가 스스로 거대권력화하며 때로는 검찰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의식하는 분위기이다. 오자와 수사는 '실세 정치인'의 최대 위기일 뿐 아니라 도쿄지검 특수부의 대국민 신뢰를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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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예산 삭감 주요 희생물로
한국도 현장 목소리 귀 기울여야

겨울이 오면 일본 곳곳에서 밤마다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홋카이도 삿포로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규슈의 사세보까지 주요 도시마다 중심가가 수십만개의 다양한 전구로 장식된다. 바야흐로 ‘루미나리에 축제’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루미나리에 축제는 일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필라멘트 전구에서 출발한 루미나리에는 발광다이오드(LED) 전구에 이르러 비로소 환상적인 색채를 완성했다. LED는 기존 전구보다 훨씬 밝고 다양한 색을 구현하면서도 전력소비는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일본은 바로 이 LED를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LED로 자유롭게 색채를 연출하려면 적색, 녹색, 청색 LED 소자가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이 중에서 청색 LED의 개발은 가장 큰 기술적 난제였다. 각국의 연구자들이 청색 LED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1993년에 비로소 일본 과학자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박사가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과학계로선 자국의 과학자가 ‘LED 혁명’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청색 LED의 개발과 이후의 전개과정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니치아화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나카무라 박사는 청색 LED를 개발해 회사 측에 연간 10억달러 이상의 기술로열티 수입를 올리게 했다. 회사 측은 당초 청색 LED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해 개발 중지를 지시했지만 나카무라 박사는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는 청색 LED가 LCD TV와 모니터, 휴대전화, 교통신호등, 차세대 DVD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면서 세계 과학계로부터 ‘일본의 에디슨’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가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은 고작 2만엔(약 26만원)의 포상금과 과장 승진이 전부였다. 회사 측은 직원의 연구성과는 당연히 회사로 귀속된다는 관행을 내세우며 특허권마저 회사로 귀속시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연구자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개발 성과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는 데 비해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연구자가 일개 샐러리맨에 지나지 않았다.

나카무라 박사는 결국 과학기술과 연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색한 대우에 실망해 1999년 니치아를 나와 미국 샌타바버라대학의 교수로 이직했다. 그의 미국행을 계기로 일본에선 젊은 과학인재들이 연구개발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인재유출 신드롬’이 일어났다. 뒤늦게 일본 정부와 기업은 과학 인재를 육성하고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일본 과학기술 연구자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최근 하토야마 정권은 예산을 삭감하면서 과학예산을 주요 희생물로 삼았다. 민주당 의원들은 “꼭 1등을 해야 하느냐, 2등은 안 되냐”면서 슈퍼컴퓨터 개발 등 각종 첨단기술 연구예산을 대폭 삭감하거나 아예 사업 자체를 폐지했다.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 등 일본 과학계를 대표하는 노벨상 수상자 4명은 이에 “하토야마 정부가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해놓고 관련 예산을 줄이고 있다”고 항의성명을 냈다.

이들은 지난해인 2008년의 과학기술 예산이 2000년을 100으로 봤을 때 중국은 436, 한국은 289, 미국은 185였는데 반하여 일본은 109에 불과했는데도 하토야마 정부가 퍼주기 공약을 위해 계속 과학연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뒤늦게 재조정을 지시했지만 과학계의 반발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과학기술은 몇몇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할 만큼 빠르게 발전했지만 막상 1990년대 정보기술(IT) 혁명이 진행되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한국과 미국에 눌리고 말았다. 일본 과학계는 과학기술과 연구자를 대하는 풍토의 차이가 빚어낸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가 폐지되고, 연구자들의 해외유출 문제까지 수면 위로 떠오른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은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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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美 완화요구에 日 꿈쩍 안해

현상유지하며 對美 협상력 높여

김동진 도쿄 특파원
주일미군 기지 재편과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급유 활동 등 안보 현안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하토야마 일본 정부의 ‘긴밀하지만 대등한 대미관계’를 평가하는 또 다른 시금석이 되어가는 양상이다.

지난 10일 양국은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 일진일퇴를 주고받았다.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미국 워싱턴을 찾은 아카마쓰 히로타카(赤松廣隆) 일본 농림수산상에게 미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월령 20개월 이하’로 제한된 일본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요건을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에 따라 대폭 완화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토머스 빌색 미 농무장관도 이날 아카마쓰 농림수산상을 만나 자국산 쇠고기 수입을 압박했다. 미국의 농업통상 정책을 좌우하는 투톱이 그간 쇠고기 문제로 일본 측에 쌓였던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 농림수산성도 자신들의 수장이 미 각료들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았다. 농림수산성은 이날 미국의 ‘타이슨 프레시 미트(Tyson Fresh Meat)’ 도축장에서 지난달 수입한 732상자의 냉동 등심 가운데 한 상자에서 광우병(BSE) 유발위험물질인 척수 부위가 발견됐다며 이 도축장에서의 쇠고기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카마쓰 장관은 이 같은 발표를 토대로 빌색 농무장관에게 강한 유감의 뜻을 전하고 금지된 부위가 포함된 경위에 대해 미 농무부 측의 조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양국의 농업통상정책 고위각료들의 첫 상견례 자리는 다소 썰렁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아카마쓰 장관의 태도를 통해 드러난 하토야마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정책은 역대 자민당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은 2002년까지 연 37만5000t(약 1조6200억원)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했지만, 고이즈미 정권 때인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사례가 최초로 발견되자 수입 중단 조치를 내렸다. 2006년부터는 생후 20개월령 이하에 한해 수입을 인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산 쇠고기의 일본 수출은 지난해 7만4000t에 그쳤다.

2008년 7월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쇠고기 수입요건의 완화를 요구했지만 후쿠다 총리는 “식품안전을 지키는 입장에서 과학적 증거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여기에는 자민당 정권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자민당은 경단련 등 경제계의 요구에 따라 미일 FTA 체결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부시 정부가 집권 말기에 들어감에 따라 FTA 체결이 다음 정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자민당 내각 지지율이 계속 위험수위인 30%대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먹을거리 안전과 농민 보호, 검역 주권에 대한 국민감정을 거스르는 도박을 하기 어려웠다.

54년 만에 역사적인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정권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신중하기는 마찬가지다. 하토야마 정권은 특히 자민당 정권보다 FTA 체결에 더 조심스럽다. 총선 매니페스토(대국민 공약)에서도 FTA 체결 대신에 ‘교섭 촉진’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들의 지지세력인 농민들을 의식해 농업분야 등을 무리하게 희생하면서 체결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본 민주당 내에선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의료개혁 등 내치개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당분간 쇠고기 수입 등 통상 현안에 드라이브를 걸기 어렵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따라서 하토야마 정권은 앞으로 상당기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의 현상 유지를 택하면서 자신들의 통상 협상력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본의 상황을 보면 한국의 통상협상 관료들은 지난해 초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두 가지 잘못된 판단을 보였다. 한국이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하면 한미 FTA가 조만간 체결될 것이며 “일본도 곧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두 가지 전망 모두 빗나갔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로 국론분열의 ‘홍역’을 치르고도 아직 뚜렷한 소득을 얻지 못한 한국으로선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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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에서 민주당 정부의 동아시아 중시 외교노선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토야마 총리는 당초 방한 전날인 8일 총리 관저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기자회견을 갖기로 예정돼 있었다. 방한에 앞서 자신의 화해와 협력 메시지를 한국 언론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회견이 실무를 맡은 외무성 관료들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사실상 무산됐다.

외무성 관료들은 하토야마 총리의 한국 특파원 기자회견을 통역 없이 일본어로만 진행하겠다고 고집했다. 국제외교 관례상 국가원수가 상대국 언론과 인터뷰할 때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발언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통역을 대동한다.

외무성 관료들의 ‘딴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 특파원들에게 답변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라며 질문을 사전에 제출받은 뒤 자신들이 직접 일부 질문 내용을 수정해 여기에 맞춰 질의할 것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회견을 하루 앞둔 7일 오후에는 참석 언론사의 규모를 일방적으로 제한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총리 관저의 회견장이 좁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이날 밤늦게 태풍으로 총리가 바쁘다면서 회견 자체를 취소하고 외무성 아주국장의 브리핑으로 대체하겠다고 알려왔다.

2년 전 후쿠다 야스오 당시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앞두고 실시한 기자회견 때는 사전 질문 수정도, 참석자수 제한도 없었다. 외무성 관료들이 갑자기 이런저런 이유로 회견을 방해하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의 친한파 행보가 못마땅한 외무성 관료들이 총리를 가급적 한국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중간에서 의도적으로 일을 꼬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이 사실인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지만 외무성 관료들이 하토야마 총리의 역사적인 한국 방문에 재를 뿌린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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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 바라보는 두 시각

‘脫美入亞’ 기대반 우려반

8·30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후 일본 사회에는 상반된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자민당의 54년 통치로 형성된 ‘썪은 물’을 말끔히 씻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은 반면 ‘초보운전자’를 바라보는 듯한 불안감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일본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일본 사회가 예단할 수 없는 커다란 정치실험에 들어간 만큼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일본의 정권교체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지배 엘리트의 국가성장전략 교체 측면에서의 분석은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도 작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지배엘리트의 국가전략은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이었다. 문자 그대로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유럽 사회를 지향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국가 간 위계서열에서 영국과 독일 등 서구 국가를 최상층에 놓고 아시아를 밑에 놓는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이 같은 흐름은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한 자민당은 국가의 지휘하에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 그 자금을 바탕으로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수출해 ‘서구식 선진국’에 들어간다는 메이지 이래 성장모델을 답습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구 중에서도 미국을 ‘준거집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자민당의 노선은 ‘안보 문제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발전에만 매진한다’는 요시다 독트린로 집약된다. 덕분에 일본은 1980년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런 ‘탈아입미(脫亞入美)’ 노선은 1990년대 들어 벽에 부딪혔다. 미 컬럼비아대학의 제럴드 커티스 교수(정치학)는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1860년대 이후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아 대국으로서 인정받은 것을 기본목표로 추구해왔는데, 그 바람이 1980년대 고도성장으로 달성되면서 목표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이때부터 자민당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통 지배세력의 혼란이 시작됐다. 일본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후 고도성장 엔진이 식어버렸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도 유럽연합(EU)을 필두로 다양한 지역공동체가 출현하면서 다극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우산’ 밑에서 2위에 안주하는 기존 전략으로는 미국의 패권이 줄어드는 만큼 자신들의 입지도 좁아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면 그간 한수 아래로 봤던 중국과 한국, 인도,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들은 무섭게 성장했다. 특히 중국의 급부상은 일본의 위기를 촉진했다.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2000년에 일본의 4분의 1에 불과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내년에 일본을 추월하고 2020년에는 미국을 앞지를 전망이다.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미국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자민당은 기존의 ‘탈아입미’에만 집착해 아시아 경시외교를 계속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 대만 등과의 잦은 외교 마찰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아시아에서 일본의 대표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G8(주요8개국) 참여에 반대하고, 유엔 사무총장 경선에서 한국에 반대표를 던진 데 이르러서는 맹목에 가까운 아집이 느껴진다.

일본 민주당의 집권은 바로 이런 낡은 전략의 교체를 의미한다. 하토야마 유키오와 오자와 이치로, 마에하라 세이지 등 현 민주당 주역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의 국가성장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대안을 추구했던 세력이다. 이들의 입장은 온도차는 있어도 ‘탈미입아(脫美入亞)’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프랑스식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유럽 내에서조차 영국과 독일에 밀리던 프랑스는 1993년 유럽연합(EU) 발족 이후 1인당 국민소득이 42%나 증가했다. 영국이 미국의 우산에 집착한 반면 프랑스는 EU 탄생과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덕분이다. 프랑스는 현재 독일과 함께 EU를 이끄는 ‘양륜(두 바퀴)’으로 불린다.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공동체의 ‘양륜’이 되겠다는 게 민주당의 구상이다. 민주당의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이 140년 만에 밀어닥친 새로운 세계사적 ‘도전’에 가만히 앉아서 당할 것이냐, 아니면 ‘응전’할 것이냐는 분기점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동진 도쿄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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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민주화를 이룬 대통령.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대통령.
   IT 강국 코리아를 만든 대통령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대통령.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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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독도해역서 韓·日 공동훈련이라니


호랑이 안방으로 끌어들인 격

독도문제 늘 日에 뒤통수 맞아


최근 2주간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놓고 벌인 일들은 곱씹어 볼수록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야 할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이 독도 문제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일본의 해상자위대 함정들이 지난 8일 강원도 동해항에 입항했다. 자위대 군함이 그간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동해항에 들어온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해군의 설명대로라면 이번 방문은 양국의 군사교류와 우호증진을 위한 행사이다. 불행한 과거에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한미일 동맹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에서 양국 해군의 교류 강화를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이들 자위대 군함이 동해항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한일 해군의 합동훈련이었다. 양국 해군은 6∼7일 ‘한일 수색 및 구조 훈련(SAREX)’을 했다. 이 합동훈련은 조난 선박 발생 시 양국 해군 간의 공동대처 능력을 배양하고 군사교류 및 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1999년부터 시작돼 이번이 6번째이다.

그동안은 한일 양국의 선박 운행이 빈번한 제주도 남방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했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독도 인근해상으로 훈련무대를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도 동남방 80㎞ 해상에서 훈련이 진행됐다. 맑게 갠 날 독도가 보인다는 울릉도가 독도에서 88㎞ 정도 떨어져 있다. 합동훈련이 얼마나 독도와 가까운 거리에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순시선이 독도 인근에 출몰한 적은 자주 있었지만 해상자위대가 이곳에서 군함을 동원해 훈련한 일은 극히 드물다. 일본은 이번 훈련에 구축함(DDH) 2척과 소해함(MSC) 1척, 초계기(P-3C) 1대, 초계헬기(SH-60J) 1대 등을 참가시켰다.

이들은 모두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舞鶴)항에 주둔한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 소속이다. 이 부대는 해상자위대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전력을 갖고 있으며 독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출동하도록 돼 있다.

한국 국방부와 해군은 이번 훈련이 어디까지나 평화적·인도적 목적이라고 강조하지만 독도를 잃어버린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일본이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비한 부대를 독도 앞바다로 굳이 불러들여야 했는지 의문이다.

지난 17일 발표된 일본 정부의 ‘2009년도 방위백서’는 이런 지적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줬다. 일본 정부는 이 백서에서 “우리나라(일본) 고유 영토인 북방 영토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된 채 존재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더구나 방위백서 부록의 ‘주요부대 등의 소재지’ 지도에는 독도를 자기 영토로 표시했으며, 제3호위대군의 작전구역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방위백서는 한 나라의 국방 운용방향과 지침이다. 일본의 자위대는 모든 작전 활동에서 이 방위백서의 내용을 따른다. 이곳에 표기된 문구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백서의 토대에 따르면 한일 해군 간의 교류와 우호증진이라는 표면적인 명분에도 일본의 제3호위대군의 속내는 명백하다. 일본 땅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유한다는 전제 하에 독도 작전을 관할하는 이 부대에 이번 합동훈련은 독도 해역을 숙지하는 좋은 계기였음에 틀림없다. 우리 입장에선 호랑이를 안방으로 불러들인 꼴이다.

독도 앞바다는 한일 합동훈련보다는 매년 1∼2회에 그치는 우리 군의 ‘동방훈련’(독도방어훈련)을 연 5∼6회로 확대해 일본이 도저히 넘볼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할 곳이다. 백 번 양보해 동해상에서 한일 공동 훈련이 꼭 필요하더라도 독도 해역만큼은 끝까지 피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와 정치인, 언론들은 한일 우호를 말하면서도 독도 문제에서만큼은 매우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전제 하에 국제적으로 자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등 차근차근 치밀하게 영토분쟁에 대비해 나가고 있다. 지난 2주간의 사건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반면 우리는 늘 일본에 뒤통수 맞기 딱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럽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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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일본판 ‘살인의 추억’의 교훈

日 최초의 DNA수사 엉터리로
증거능력 다시 살펴봐야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오랜 여운을 남기는 걸작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터널 앞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가 내리는 철길 위에서 극중 서형사(김상경)가 유력한 용의자 박태규(박해일)를 두들겨 패며 범행 자백을 요구하고, 박태규도 악에 받쳐 자기가 죽였다고 대들면서 관객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때 멀리서 박형사(송강호)가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뛰어온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의뢰했던 DNA 분석 결과가 담긴 미개봉 서류였다. 박형사가 수갑을 찬 박태규를 때리는 사이 서형사는 재빨리 봉투를 뜯어 서류를 확인한다.

분석 결과는 DNA 불일치였다. 박태규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탈해진 박형사가 수갑을 풀어주자 박태규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분을 삭이지 못한 서형사가 터널을 향해 권총을 쏘아대지만 사건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만다.

실제 화성연쇄살인범을 쫓았던 당시 수사팀은 영화에서처럼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정액과 유력 용의자의 DNA 일치 여부를 1990년 외국기관에 의뢰했다. 다만 영화에서와 달리 분석을 맡은 곳은 미 FBI가 아니라 일본의 과학경찰연구소였다.

 그런데 한국 경찰이 일본에 화성사건의 DNA 분석을 맡긴 1990년 당시 일본의 DNA 과학수사가 얼마나 문제투성이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지난 17일 일본 TV방송에는 도치기현의 경찰본부장이 한 노인에게 머리숙여 사죄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 노인은 62세의 전 무기징역수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였다. 그는 1990년 자신이 버스운전사로 일하던 유치원의 4세 여아를 성추행하고 죽였다는 혐의로 일본 최초로 DNA 수사를 통해 붙잡힌 엽기살인범이었다.

하지만 그의 범행을 입증한 결정적 증거였던 DNA 분석이 엉터리였다는 것이 법원 재검사에서 밝혀지면서 그는 지난 4일 수감 17년 만에 석방됐다. 17일에는 자신을 수사했던 경찰수사팀의 책임자를 만나 처음으로 공식 사죄를 받았다.

1990년은 일본 경찰이 DNA 분석을 도입한 지 얼마 안 된 초창기였다. 당시 사용된 DNA 분석기법은 체액의 주인을 1000명당 1.2명 수준으로밖에 확정짓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증거로만 사용돼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 경찰과 검찰은 아동 성추행 살인범을 빨리 잡기를 바라는 여론을 의식해 다른 물증 없이 DNA 분석 결과만을 거의 유일한 증거로 스가야를 기소했다. 언론들은 ‘일본 최초의 DNA수사 개가’라는 검경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인권변호사들과 법의학자들이 법정에서 경찰의 DNA 분석의 한계와 결함을 지적하며 스가야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1심부터 3심 재판부까지 모두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스가야의 변호인단은 이후 16년 동안 줄기차게 DNA 재검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급기야 2003년 4조7000억명 중 1명 수준으로 DNA 분석의 정확도를 높인 신기술이 나오자 일본의 인권단체들과 변호사협회까지 나서서 재분석을 요구했다. 법원은 결국 여론에 밀려 2008년 12월 재분석을 실시했고, 올해 5월 스가야가 범인이 아니라는 최종분석 결과가 도출됐다.

그동안 스가야의 재검 요구를 묵살했던 일본 경찰과 검찰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2003년 이전까지 DNA 분석 결과를 유력한 증거로 채택해 기소했던 사건들에 대해 그 증거능력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비단 일본만의 일이 아닐 수 있다. 화성사건의 DNA 분석을 일본에 의뢰했던 국내 경찰도 1년 뒤인 1991년 국과수를 통해 DNA 분석을 시작했다. 우리 경찰도 2003년 전까지 10년 이상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불완전한 DNA 분석을 수사에 사용했다.

국내 최초의 DNA수사 성과는 1992년 8세 여아를 강제추행하고 달아난 범인이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현장에 떨어진 신문지에 묻은 정액의 DNA 분석을 통해 붙잡힌 사건이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과거 사건 수사에 활용된 DNA 증거능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쿄=김동진 특파원 bluewins@segye.com



김동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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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에 대한 단상>

내가 아는
한국 정치판은 시커먼 '뻘밭'이다.

그 뻘밭에 들어가면
누구나 시커먼 진흙이
몸에 묻게 된다.

어떤 놈은 머리 끝까지 온통 처바른 놈,
어떤 놈은 발과 무릎에만 묻은 놈,
차이는 있어도 거의 누구나 묻게 돼 있다.

 DJ는 그 뻘밭을
 가신의 등에 업혀 건넜다.

가신은 '주군'을 위해
진흙에
자신의 몸을 더렵혔지만
덕분에 DJ는
뻘밭을 무사히 건넜다.

'바보 노무현'은
이상주의자답게
안희정, 이광재 등과
어깨동무하고
그 뻘밭을 조심스럽게 건넜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그 어떤 정치세력보다
진흙이 덜 묻었지만

결국 뻘밭을 건넌 후
자신의 신발에
묻은 작은 진흙들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
건넜으면 좋았으려만...,

그는 그것조차 허용할 수 없는
' 바노 노무현'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어리석고,
또 한편으론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이제는
뻘밭이 되어버린
정치판을
우리 국민이
바꿔줘야 한다.

여야
누구라도
진흙을 묻히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바보 노무현의 신발에
묻은 진흙으로
자신의 온몸에 묻은
그 더러움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더 이상
발붙힐 수 없도록.....,


-------------------------------------------------
 한때
 정치부 기자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면서
지켜봤던 우리 정치판의 이면과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아
그 단상을 짧게 남깁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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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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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아라이 쇼케이(한국명 박경재) 자민당 중의원 의원


기득권에 맞섰던 한국계 중의원

비극적인 최후 ‘노무현과 닮은꼴’

조용한 주말 아침. 한국에서 타전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 소식에 일본 내 한인 사회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한국 정치문화에서 자살은 흔치 않은 사건이다. 그간 전직 대통령 2명을 포함해 적지 않은 권력핵심 인사들이 부패와 비리로 검찰조사를 받거나 감옥에 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더욱 안타깝고 충격적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정치인의 자살이 그리 낯설지 않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배를 가르던 사무라이의 할복 문화 탓인지 정치적 위기를 맞으면 구차한 변명 대신 자살을 택하는 정치인이 종종 있었다. 1945년 12월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가 태평양전쟁 전범재판을 거부하며 음독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현직 의원이나 각료가 자살한 사례만 8건에 달한다. 가깝게는 2007년 5월 마쓰오카 도시카쓰 당시 농림수산상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야당의 퇴진 압력에 시달리자 목을 맨 사건이 있었다.

심심치 않게 터지는 일본 정치인의 자살 중에는 아직도 60만 재일동포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사건이 있다. 1998년 2월 19일 50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 자민당 중의원의 죽음이다. 아라이는 원래 박경재라는 이름의 재일교포 3세였다. 그는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18살 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이후 1967년 도쿄대에 진학해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신일본제철에 입사하여 토종 일본인도 선망하는 대기업 사원이 됐다. 그러나 아라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주경야독으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일본 최고의 관료 집단인 대장성에 입성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업무 능력으로 촉망받는 관료로 성장했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이자 대장상이었던 와타나베 미치오는 그런 아라이의 능력을 높이 사 정계 입문을 권했다. 아라이는 와타나베 부총재의 추천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냈고 1983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 후보는 현 도쿄도 지사인 극우파 망언가 이시하라 신타로였다. 이시하라는 “조센징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면서 노골적으로 아라이의 혈통을 물고 늘어졌다. 이시하라의 선거운동원은 아라이의 선거포스터 3000여장에 ‘66년 북한에서 귀화’라는 내용이 적힌 검은 스티커를 붙였다. ‘그의 가족이 북한의 스파이’라는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아라이는 결국 쓰라린 패배를 맛봐야 했다.

그러나 아라이는 1986년 선거에 재도전해 중의원 배지를 달았다.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원내 진출 후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정치구조 개혁에 앞장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당내 보수적인 원로 의원들의 미움을 받게 됐다.

그런 와중에 1997년 12월 22일 닛코증권사가 차명계좌를 개설해 아라이에게 정치자금을 조성해준 사실이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정치인과 증권사 간의 은밀한 거래는 일본 정계의 오랜 관행이었다. 아라이는 “수많은 의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나만 문제 삼는 것은 민족차별”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관행이나 표적수사라는 항변으로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뚜렷했다. 결국 그는 체포되기 직전 스스로 목을 맸다.

아라이의 삶과 노 전 대통령의 삶은 닮은 데가 있다. 아라이는 일본 내 비주류로 출발해 민족차별을 극복하고 정계의 중심까지 진출했지만 관행적 부패에 연루돼 결국 자살을 택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상고 출신에서 최고의 권좌까지 오르는 성공 신화를 이뤘지만 퇴임 후 가족과 측근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역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라이가 죽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일본 정치권의 부패는 이어지고 있다. 아라이를 비롯한 여러 정치인의 자살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 원인인 정치관행을 개선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최근에도 제1야당의 대표가 비리로 사퇴하기도 했다.

한국 정치권은 지금 전직 국가원수가 비리와 관련하여 자살한 유례없는 비극을 경험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권은 비슷한 시련을 정치개혁의 계기로 삼지 못했다. 일본의 우를 답습하지 말고, 여야 모두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후진적 정치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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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유천지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퇴임 후 '비리 논란'에 휩싸였지만  
 고인이 한국 정치의 발전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5공 청문회에서 독재자 전두환을 향해 거침없이 호통치던
노 전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때의 그 '진정성' 만큼은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삼가 애도합니다.

2009년 5월 23일  도쿄에서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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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 1월 3당합당을 의결하던 통일민주당 의총장에서 반대하는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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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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